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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이야기 – 선녀와 나무꾼(거짓말과 오도된 진실)

 


줄거리 : 아주 옛날 한 마을에 나무꾼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달려와서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나무꾼은 쌓아 놓은 나뭇더미 속에 사슴을 숨기고는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했다. 살아난 사슴은 나무꾼에게 산을 돌아 나가면 하늘의 선녀들이 멱을 감는 연못이 있으며 멱을 감는 틈을 타서 그중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라고 했다. 다만 둘이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기까지는 날개옷을 감추고 절대로 보여 주지 말라고 했다. 나무꾼은 연못을 찾아가서 사슴이 일러준 대로 했다. 멱을 다 감은 선녀들이 다들 하늘로 돌아가는데, 날개옷을 도둑맞은 막내 선녀는 그러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 나무꾼은 막내 선녀를 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았다. (후략)

 

필자는 옛날부터 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냥꾼에 대한 연민과 결혼하기 위한 나무꾼의 범죄 행위 등 그다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국제결혼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아껴(?) 놓았는데 최근 고위층 인사들의 거짓말이 화두에 오르기에 이렇게 꺼내 놓게 되었다. 이야기에서 나무꾼은 사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많은 동화책에서는 나무꾼은 착한 이미지로 그려 놓고 사냥꾼은 대부분 털보에 험악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이들은 그림을 보며 나무꾼의 거짓말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계속 강조했듯이 이렇게 상징을 통해 생각할 기회를 뺏는 것은 결코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사냥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에 대한 정당성은 이야기하지 않도록 한다. 이번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와 기타 거짓말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들이다.

 

윤리적 행위의 기준은 다음 질문의 답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옳은 행동을 옳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결과주의 윤리설은 “행동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갖는 한 옳다.” 라고 대답을 하고 동기주의 윤리설은 “행동은 의무의 최고 원리의 요구사항을 만족하는 행위의 규칙에 일치하면 옳다.” 라고 대답한다(전자를 목적론적 윤리설, 후자를 의무론적 윤리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다시 말해 전자는 결과가 선하고 좋으면 옳고 후자는 동기가 선하고 좋으면 옳다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벤담이나 밀이 있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칸트가 있다. 이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나무꾼의 행위는 벤담에게는 옳은 행위고 칸트에게는 그른 행위가 된다. 물론 이를 다 포섭하려고 하는 절충주의 윤리학이 있기는 하지만 위 두 이론만큼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논의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서인데 바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 :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샌델은 저서에서 공직자와 정치인의 도덕성은 일반인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루스벨트와 존슨의 거짓말을 예로 든다. 둘 다 전쟁 준비를 부정하여 대중을 속였는데 루스벨트가 히틀러에 대한 기만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면 존슨은 당선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

즉 둘의 거짓말에는 목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도덕적 지위가 다르다고 말한다. 존슨의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목적을 위해 행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와는 달리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거짓말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이었고 비록 그것이 부적절할지라도 사적영역임을 이유로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탈무드」를 인용하는데 탈무드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예외를 인정한다.

지식, 환대 그리고 성에 대한 거짓말이다.

무엇을 아느냐는 질문에 지적인 과시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 그리고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을 때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짓말, 마지막으로 부부의 성생활과 같은 사안에 대한 거짓말이며 클린턴의 경우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데 한국의 경우 공직자 및 정치인들에게 사적인 영역에서도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밌는 논의가 발생한다. 바로 ‘오도된 진실’에 대한 논의다. 오도된 진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고 타인을 기만할 수 있음을 말한다.

클린턴이 대선 후보 당시 그는 영국 유학 시절에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었는데 향락성 약물을 사용 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미연방이나 주의 마약류 금지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 라고 대답했다.


즉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오도된 진실과 거짓말에 대해 윤리학자들은 대부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남을 기만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다르다. 칸트에 따르면 양자는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칸트는 살인자가 집으로 찾아와 숨긴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칸트는 거짓말이 그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히며 동시에 당사자의 인간적 존엄성도 손상시키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도된 진실은 다르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도덕적 고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칸트에게 기독교 신앙을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떤 강연이나 저술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 했다. 그러자 칸트는 약속했다.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저는 앞으로 종교와 관련된 모든 공개 강연과 저술 활동을 완전히 중지할 것입니다.”


몇 년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자 칸트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강연과 저술을 시작했다. 그는 약속도 깨지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약속은 오직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라는 조건 하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오도된 진실에 대한 길을 어느 정도 열어둠으로써 거짓말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이야기에 적용해보면 사냥꾼이 나무꾼에게 사슴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나무꾼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그 사슴 본 적은 있는데 지금 이 앞에 있지는 않아요.”

사슴은 나무꾼 ‘뒤’의 나무 더미 안에 숨어 있으니 이것이 거짓말이 아닌 오도된 진실로서 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오도된 진실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오도된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악용했는지 충분히 봤고 그것이 결코 그들의 도덕적 지위를 상승시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오도된 진실의 사례를 많이 보고 살아간다. 영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거짓말의 세 가지 종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세 가지는 Lie(거짓말), Damn Lie(나쁜 거짓말) 그리고 Statistics(통계)다(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West Wing 시리즈 중 하나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다음 문장을 보자.

‘올해 매출액이 전년도에 비해 자그마치 120%로 상승했다.’

‘올해 매출액이 전년도에 비해 20%가 상승했다.’

실제 두 문장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도 전자가 후자에 비해 매출액이 엄청나게 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범죄율도 마찬가지다. 관할 지역 내 살인사건이 전년도에 10명, 올해 7명이었다면 관할서에는 살인사건이 3건 감소했다고 표현하는 대신에 30%가 감소했다고 할 것이다. 진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는 경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에 따르면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을 섞어야 제대로 효과를 낸다고 한다. 또 이런 경우는 명백히 거짓말임을 판단하기 어렵다. 민사소송에서 형사소송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사기죄가 성립해야 하며 이때 피의자의 고의성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런 이유로 대부분 피해자들이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내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거론된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1)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양 눈썹의 중간 부분이 위로 치솟아 이마에 잔주름이 만들어 진다.

2)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평소보다 코를 자주 만지는 경향이 있으며 자주 입을 손으로 가린다.

3) 오른손잡이가 무언가를 지어낼 때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한 후 오른쪽으로 보게 되며 왼손잡이는 그 반대다.

4)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늘어놓는다.

5) 질문을 했을 때 당신이 썼던 단어들을 그대로 반복한다.

6) 거짓말을 할 때 숨을 빠르게 쉬는 경향이 있으며, 짧은 숨을 여러 번 쉬다가 긴 숨을 내 뱉는다.

7) 거짓말쟁이는 침묵을 견디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한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더 산만하게 설명을 하려 든다.

몰론 이 중 하나로 거짓말을 판별해서도 안 되고 이를 맹신해서도 안 된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일종의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뜻한다.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직면했을 때 많이 발생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도 진실로 믿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판단할 수 없다.

 


거짓말은 분명 인간 사회에 있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거짓말로 남을 해칠 수 있고 남을 구할 수 있다. 필자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고는 나의 친척 누나로 오해한다는 거짓말.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이제 나는 다 컸으니 혼자서 다 잘 해낼 수 있다는 거짓말. 칸트처럼 살 수 없으니 거짓말을 아예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거짓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결국 우리는 외로워질 것이다. 남이 나를 못 믿는 것처럼 나도 남을 못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페르마의 밀실(Fermat's Room, 2007)에 나왔던 거짓말에 관련된 문제를 제시하니 시간이 되는 사람은 천천히 풀어보길 바란다.


 "거짓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진실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진실을 말한다. 한 외국인이 문이 2개 있는 방에 갇혔다. 하나는 자유로 가는 문이고, 하나는 아니다. 한 문은 거짓 나라의 간수가, 다른 문은 진실 나라의 간수가 지키고 있다.

외국인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각 간수에게 한 번씩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을 수 있다. 어느 쪽이 진실 나라 간수이고 거짓 나라 간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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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 양치기 소년(믿지도 말고 속지도 말자)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거짓말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며 돌아갔지만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양치기 소년은 몇 번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서 양치기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으나 동네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양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모두 이 교훈을 ‘거짓말을 하지 말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얻을 수 있는 더 큰 교훈은 ‘큰 재난은 우리들의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수업시간에 갑자기 화재발생경고가 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들은 백이면 백,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름끼치고 무책임한 행동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양치기소년은 일종의 경보 장치다. 가장 첫 번째 사건 때 경보 장치가 고장(?)났다면 응당 교체했어야 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고, 아마 다음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리라.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으며 양떼의 죽음이라는 큰 재난을 감수해야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도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업무의 과중과 잦은 스크린 도어 결함 등이 지적되어 왔었다. 이 때 응당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노력’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우리는 정치인들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거짓말쟁이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치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표출함에도 그들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안전을 특정 소수에 의존할 때 어떻게 사회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행정학에서도 가외성(redundancy)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외성이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오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체제의 신뢰성과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중첩성(overlapping)과 중복성(duplication)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같은 업무의 전담부서를 2개 이상으로 구성하거나 예비 인력 등의 확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전이나 위생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이를 이야기에 적용하자면 양치기 소년 단 한사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양치기 소년을 한 명을 더 두었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랬다면 단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양들이 모두 잡아먹히는 최악의 상황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전의 영역에서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는 애초의 목적을 망각하게 되며, 투입 비용에 비해 사회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또한 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국 국민이 된다. 즉 효율(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력을 감소시킨 것이 고인이 된 김군이라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안전 불감증이라는 것은 재난의 작은 경고단계를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따라서 고장 나버린 시스템과 믿을 수 없는 정치인, 비효과적 행정체계를 불신하고 우리 각자가 안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의 미학’이다.

새로운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었고 그 자리에서 양치기 소년을 해고하는 동시에 2명의 양치기 소년을 정규직으로 고용하였고 1명을 예비인력으로 상시 준비시켰다. 또한 양치기 소년의 법적의무와 권리를 성문화하였으며 나아가 늑대가 나타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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