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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이야기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촛불의 승리 그리고 진보와 보수)

 줄거리 : 쥐가 고양이에게 자주 잡히자 견디다 못한 쥐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쥐들은 서로 지혜를 짜내어 고양이가 오는 것을 미리 알아내는 방법을 궁리하였으나, 크게 신통한 의견은 없었다. 그때 조그만 새앙쥐 한 마리가 좋은 생각이 있다면서 나섰다. 그 묘안은 고양이 목에다 방울을 달아 놓으면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가 날 것이므로, 자기들이 미리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쥐들은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그때 한 구석에 앉아 있던 늙은 쥐가 “누가 고양이에게 가서 그 목에다 방울을 달 것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는 쥐는 없었다.

 

쥐(국민)들은 지금까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기 위해 대표(국회의원)를 선출했다. 하지만 대표들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결국 쥐들은 결정했다. ‘방울’을 다 함께 직접 달자고. 그것이 백만 촛불 집회다. 국민들은 함께 뭉쳐 행동할 때 비로소 바꿀 수 있다는 큰 경험을 했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국민의 대리인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큰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매번 국민들이 직접 방울을 달러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방울을 달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가 더 중요한 시기이다. 정치구조는 재편될 것이고 또 다른 정치 권력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 다툼을 어떻게 건설적인 다툼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 바로 진보-보수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하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위한 자세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진보와 보수의 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좌파와 우파의 차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 대혁명 때 열렸던 국민의회에서 유래하는데 왼쪽에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공화파가 자리를 잡았고,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왕당파가 앉았다.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열렸던 국민공회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서민들을 대신해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자코뱅’이 좌측에 앉았고, 부자 계층을 대표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지롱드’가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대체적으로 좌파는 급진개혁, 사회주의, 농민과 노동자, 빈민 등을 대변하고, 우파는 온건개혁, 자유주의, 자본주의, 상공업자, 부자 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좌파와 우파는 정치성향을 의미하며 진보와 보수는 이런 정치성향을 실천하는 행동양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진보는 현재 체제를 바꾸고 개혁해 나가자는 의미기에 좌파와 거의 뜻을 같이하고, 보수는 현재 체제를 지키자는 의미기에 우파와 뜻을 같이한다. 개념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사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는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개혁이 좌파의 주장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에서 대체적으로 진보는 좌파, 보수는 우파로 정의되므로 이하에서는 진보는 좌파를 보수는 우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다.


 먼저 진보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진보는 미래를 중시하고 이상주의적 관점을 지향한다. 좌파는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윤리 중심(관계적 측면)의 사회를 추구한다. 범죄자와 노숙자의 원인을 사회와 경제구조에 찾으며 진보에게 자유란 권력남용이나 불평등에서의 자유를 의미하고 평등이란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후자를 조금 더 중시한다. 진보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추구하며 간혹 단체를 만들더라도 집단이나 조직 보다는, ‘연대’라는 개념을 쓴다. ‘수평적 연결’이라는 인식기반을 가지기 때문이다. 진보는 시장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을 위해 국가가 시장에 간섭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럼으로써 불평등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부를 골고루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보수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보수는 과거를 중시하고 적자생존 등의 관점을 지향한다. 보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도덕 중심(내적 측면)의 사회를 추구한다. 범죄자와 노숙자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에서 찾으며 보수에게 자유란 국가에 대한 개인의 행동 범위를 의미하며 평등이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고 전자를 조금 더 중시한다. 보수는 계급을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를 추구하기에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을 구성하며 사회전체를 공동체로 보지 않는다. 보수는 시장 원리를 신봉하며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는 개인이 부를 축적하도록 자유롭게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오히려 이로 인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사고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남쪽은 우파, 북쪽은 좌파로 이념적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6·25 전쟁을 겪고 사람들에게 ‘좌파’는 곧 북한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을 염두에 두고 정부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좌파’,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탄압했다. 이를 거꾸로 보아 진보 진영에서는 친일파, 독재 및 재벌 중심을 ‘우파’, ‘수구’라는 이름으로 공격하게 되었고 결국 한국에서는 좌파나 우파보다는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 하면 흔히 반공 주의, 재벌 중심의 시장 경제 질서 인정, 강력한 대통령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보수는 자신들이 한국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일으킨 주역들이라고 평가한다. 반대로 진보는 남한과 북한의 화해, 복지 및 민주화 확대 등으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사람들을 말하며 자신들이 과거 권위적주의적 정치 체제를 뒤엎고 민주화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라고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평소 비율이 진보 25 : 중도 40 : 보수 35 정도이고, 선거 때가 되면 진보 35 : 중도 20 : 보수 45 정도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지금의 시국에서는 또 다를 것이다.

 


일반적으로 진보는 보수에게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고, 보수는 진보에게 ‘위선적’이라 비난한다. 보수가 생각하는 ‘우리’는 가족, 학교, 고향 그리고 크게는 국가까지고, 진보의 ‘우리’는 그것보다 더 크다. 그렇기에 보수는 종종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도덕적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은 가족과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보 또한 자신의 순수함을 오도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정의란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 진영의 선거 현수막을 잘 보면 슬로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대체로 보수 진영의 현수막은 공약이 구체적이다. 우리 지역에 얼마를 가져다주고 일자리를 몇 개 만든다는 식이다. 진보는 그것보다 좀 더 추상적이다. 경제 민주화, 부패 척결 등의 식이다. 이렇기에 나이가 많은 유권자의 경우 자연스럽게 더 이해가 잘 가고 와 닿을 수 있는 보수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다. 단지 박정희 향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는 복지효과가 경제를 살린다고 생각하고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는 낙수효과가 경제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양 진영의 슬로건이 반대가 되어야 맞는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남북 대립, 독재, 일제 등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기형적은 경쟁구조로 변질된 것이다(실제로 포퓰리즘 공약의 경우 오히려 보수 진영에서 더 남발하고 있다는 점과 구체적 대안 없는 추상적 메시지성 공약만 남발하고 있는 것은 진보 진영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사실 각 사안별로 진보와 보수의 양 입장을 교차적으로 지니고 있다. ‘EBS 다큐프라임 킹메이커 2부 – 중도파는 중간에 있지 않다’에서 한 실험이 있다. 똑같은 내용을 프레임만 조금 다르게 해서 질문을 했더니 재밌는 결과가 나타난다. KTX 민영화에 대한 질문을 ‘KTX 일부 노선을 사기업에 매각하는 것에 찬성하십니까?’와 ‘고속철도의 경쟁체제도입에 찬성하십니까?’로 나누어서 질문했다. 사실 두 질문은 같은 뜻이다. 전자의 경우 반대가 월등히 많았으나 후자의 경우 찬성에 대한 비율이 전자에 비해 월등히 높아졌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 성향에 대해 매우 복합적인 대응을 한다는 반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 진영에서는 조금이라도 보수 진영의 사고방식을 지닌 진보에게 ‘회색 분자’라고 낙인을 찍는 것이다. 진보 진영의 ‘순혈주의’ 탓일 것이다. 물론 ‘정통성’ 차원에서 본다면 보수 진영도 마찬가지다. 진영에 따라 상대방을 오로지 비방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다. 진보는 지켜야할 가치와 속도를 감안하며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보수는 사회 발전을 위한 이상적 가치를 감안하며 공동체를 더 강화해야 한다.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지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진보는 아직 쓸 만한 데 버리려는 고집을 꺾고 보수는 이젠 쓸모없는 데 안 버리려는 고집을 꺾어야 한다.

 


향후 보수와 진보의 경쟁은 시장 경제 질서에 대한 정의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것이다. 즉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대한민국의 방향 설정에 대한 논의로 경쟁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젊은 보수층이 등장할 것이며, 사회 민주주의 사상으로 선회한 중년 진보층이 등장하여 새로운 경쟁 구도가 나타날 것이다. 양 진영의 건전한 경쟁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부패 척결과 합리적 정치 구조의 개편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결국 자신의 진영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상대 진영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단단한 보수가 버티어야 예리한 진보가 탄생할 수 있다. 상상해보라. 대한민국이 보수 일색이거나 아님 진보 일색으로 변한다는 것처럼 한국 정치 역사에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고양이 목에 방울을 함께 달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제는 방울의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남았다. 더 이상 정치인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가 자각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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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번째 이야기 – 아기돼지 삼형제(원자의 발견과 양자역학, 그리고 전쟁)

 


줄거리 : 옛날 옛적에 아기돼지 삼형제가 엄마돼지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엄마돼지가 각각의 집을 짓고 독립하여 살되 나쁜 늑대를 조심하라고 경고를 해준다. 그래서 아기돼지들은 각자의 길로 떠나게 된다. 첫째 아기돼지는 짚으로 집을 지어서 늑대가 쉽게 무너뜨리고 잡혀먹는다. 둘째 아기돼지도 나뭇가지로 집을 지었지만 마찬가지로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셋째 아기돼지는 벽돌로 튼튼하게 집을 지어서 늑대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늑대는 화가나 셋째 아기돼지의 집 굴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아기돼지가 준비해둔 끓는 물에 빠져 황급히 달아난다.


사실 이 이야기에서 교훈을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건축학적으로 보았을 때 집은 튼튼한 재료로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세계로 들어 가보면 짚이나 나무, 그리고 벽돌의 구성성분은 큰 차이가 없다. 정말 아주 아주 작은 차이가 있기에 오히려 그 세계를 들여다보면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저 이야기는 물리학자들에게는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할 것이다(물론 읽지도 않겠지만). 그래서 오늘은 시사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바로 그 재료에 대한 복잡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지금이야 우리는 과학시간에 분자-원자-핵 등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배우고 있다. 하지만 그 발견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물리학도가 아니기 때문에 중간중간 용어의 그른 선택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두며 이 부분에 대해 아는 분들은 꼭 가르침을 주기 원한다.


지금으로부터 딱 110년 전에 루드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이라는 과학자가 호텔에서 자살을 했다. 그는 평소에 우울증을 갖고 있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그의 이론에 대한 기존 과학자들의 배척과 비난이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물질은 무한하게 나뉠 수 없으며 결국 아주 작은 입자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정설로 굳혀진 원자론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당시에 우스갯소리 취급을 당했다. 물론 이런 비슷한 주장을 하는 과학자가 몇몇이 있었지만 어차피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증기기관의 발달은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증기기관의 발달로 인해 과학계와 산업계에서는 고온과 고압의 증기기관 내부의 물과 증기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고 예측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 볼츠만은 이미 증기가 수백만 개의 입자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종의 방정식을 통해 증기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해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파는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방정식이라는 것이 수학적 편의에 불과하다고 반박했으며 볼츠만의 이론을 허구의 소설로 치부해버렸다. 이런 이유로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볼츠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이미 그의 이론이 인정을 받았으나 미처 그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1년 전에 이미 26세의 한 젊은 과학자가 원자의 존재를 논문을 통해 명쾌하게 증명했던 것이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다.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은 1827년에 꽃가루의 작은 입자가 물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논문을 하나 발표했다. 이 논문은 꽃가루를 물에 풀어 놓고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에 대한 것인데, 꽃가루가 천천히 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범퍼카처럼 이리저리 바쁘게 왔다갔다 움직이는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원자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다. 즉 아인슈타인은 물이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있고 이 입자가 꽃가루를 건드리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원자의 크기까지 계산했다. 당시 계산 값은 바로 1/1010m 였다.

 

결국 볼츠만의 원자론은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원자의 존재를 통해 이론을 이제 막 발전시키려는 찰나 갑자기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1910년의 영국 맨체스터에는 두 명의 과학자가 있었다. 바로 어니스트 러더포드(Ernest Rutherford)와 닐스 보어(Niels Bohr)다. 둘은 성격 등을 포함해 매우 다른 스타일을 갖고 있었는데 러더포드는 실험주의자였고 보어는 이론주의자였다. 한편 이미 1896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중요한 발견이 있었는데,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이었다. 러더퍼드는 바로 이 방사선에 주목했다. 그는 방사선을 갖고 여러 가지 실험을 했다. 1909년 그는 특별한 실험을 하나 진행했다. 이를 위해 라듐의 성질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라듐에서는 아주 강한 방사선이 나오는데 러더포드는 그것을 알파선이라고 했다. 라듐은 이 방사선 즉 입자들을 계속해서 밖으로 쏘아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이 성질을 이용해서 그는 제자들에게 간단한 실험을 맡긴다. 라듐 앞에 아주 얇은 금박을 배치하고 그 뒤에 인광판(phosphor screen)을 설치한 다음 금박을 투과해서 인광판에 도달한 입자의 수를 세는 것이었다. 대부분 입자는 금박을 통과했다. 그러나 러더포드는 아주 가끔씩 통과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입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8,000개 중에 한 개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러더포드는 원자의 세계가 마치 태양계와 같다고 추측했다. 음전하를 띤 전자가 양전하를 띤 핵의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파선 입자들 중 몇은 바로 이 핵에 부딪혀 통과하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고 나머지는 그 빈 공간을 통과한 것이다. 그래서 8,000번 중에 1번이라는 것으로 핵이 원자보다 1/10,000의 크기라는 것을 계산한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모형에 따르면 원자는 대부분 빈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파입자가 원자를 통과한 것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몸 전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기에 빈공간이 대부분이라는 괴상한 결론에 다다른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방식의 설명을 전제할 때 기존 물리학에 따르면 핵의 주위를 도는 전자는 언젠가는 그 회전력을 잃고 핵으로 향해야 한다. 즉 원자가 붕괴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에 기존의 과학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으며 그 때까지의 모든 이론을 수정해야 했다. 이른바 패러다임의 교체였다.

이제 새로운 젊은 과학자들이 원자론을 갖고 구세대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닐스 보어였다. 그는 러더포드에게 달려갔으며 왜 원자가 붕괴하지 않는지 밝히는 것을 자신의 숙제로 삼았다. 그는 원자의 수수께끼를 빛과 연결 지어서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물질을 가열하면 빛을 낸다. 그리고 그 빛은 물질에 따라 다른데 예를 들어 구리는 푸른색, 나트륨은 노란색을 발한다. 이것을 스펙트럼(spectrum)이라고 한다. 보어는 이것을 통해 원자 모델을 설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자 도약(Quantum Leap)’이다. 이 괴상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보어는 러더포드와 달리 원자를 태양계로 설명하지 않고 고층빌딩으로 설명했다. 맨 아래 1층에는 핵이 산다. 그리고 위층에는 전자들이 산다. 이 때 가끔 전자들이 다른 층으로 순식간에 이동을 하며 전자들이 고층에서 저층으로 내려올 때 빛을 낸다는 것이다. 또한 내려온 그 거리에 따라 빛의 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수소실험을 통해 이것을 증명해냈다. 그러나 문제는 보어조차도 왜 원자가 빌딩구조를 하고 있는지 또한 왜 양자도약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양자도약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기존 과학자들의 반발을 샀다. 즉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이론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 과학자들은 이 젊은 신세대 과학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지도자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20년대 초까지 보어의 이론을 반박하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쉽게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1925년에 아인슈타인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오게 되는데 이를 통해 구세대 과학자들은 다시 반격의 깃발을 올리게 된다.

편지는 보낸 프랑스인 박사는 바로 루이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였다. 그는 전쟁 중에 전파로 원자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전파도 역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방정식으로는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원자 주위에 파일럿 파라는 전파가 흐르는데 이것이 전자를 궤도에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고 논문에 썼다. 즉 파동이 전자를 잡아주기에 원자가 붕괴되지 않으며 또한 양자 도약이라는 개념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프랑스 학자의 논문에 크게 감동받아 젊은 과학자 집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승리를 자신했다. 물론 보어를 위시한 젊은 세력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양자 도약을 다시 새로운 이론으로 재무장하여 반격을 도모하였다. 바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의 배타 원리(exclusion principle)였다.

 


파울리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왜 원자는 동일한 구성물로 형성되는데 그렇게 많은 형태와 다양한 특성을 보이는 것일까? 예를 들어 금과 수은은 전자 하나의 차이밖에 없다. 금이 79개, 수은이 80개다. 왜 전자 하나 차이가 두 물질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일까. 파울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어의 이론에 수정을 한다. 보어의 이론에 더해 각 층에 들어가는 전자의 수가 정해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에 전자가 추가될 때 맨 윗 층에 이미 전자가 들어가 있다면 새로운 층이 그 위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원자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며 원자의 성질 또한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배타 원리였다. 이를 전제로 그는 지구상 모든 생물의 다양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이 이론도 보어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허점이 있었다. 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시 이를 이유로 아인슈타인의 구세대 과학자 집단은 이를 반박하기 시작했다. 점점 양 진영은 과격하게 상대를 비난했고 승리를 위해 모든 지성을 쏟아 부었다. 그래서 결국 양 집단에 새로운 돌격대장이 임명되게 된다. 신세대 과학자 집단에서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가, 구세대에서는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가 나서게 된다.

 


슈뢰딩거는 브로이의 이론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그는 전자가 에너지의 파장 때문에 너무 빨리 움직여서 구름처럼 보인다고 했다. 또한 그 파동을 방정식으로 완벽하게 표현해내었다. 이 의미는 바로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원자를 묘사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다. 바로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이다. 이를 통해 신세대 과학자 집단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원자의 세계를 간단하게 표현해줄 수 있었다. 구세대 과학자들은 그 안정감에 매료되었다. 적어도 그들은 원자의 모습을 기존의 이론으로 묘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론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양자 도약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세대 과학자들은 이 약점을 가만 두지 않았다. 특히 신세대 세력의 새 돌격대장 하이젠베르크는 슈뢰딩거에게 강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원자를 설명하기 위한 태양계 비유나 고층빌딩 비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기존의 모형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원자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학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이를 단순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기본적으로 곱셈은 그 순서가 상관없다. 즉 4*7이나 7*4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자에서는 곱셈의 순서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그는 이러한 차이를 행렬을 이용하여 풀어냈다. 그 결과 수식을 이용하여 원자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측해낼 수 있었다. 당연히 이 수식에 대해 구세대의 과학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말도 안 되는 수학은 기존의 수학이론마저도 부정하는 결과였기 때문이며 나아가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하이젠베르크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원자를 물리적 실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에 큰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크게 낙심했다. 그는 슈뢰딩거의 강의실을 찾아 갔다가 공개적인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는 그의 경력이 거의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경이로운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왜 원자를 시각화할 수 없는가? 왜 원자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가? 그 대답은 단순했다. 그것은 원자가 본질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원자가 갖고 있는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즉 원자의 위치를 알면 그 속력을 알 수 없으며 그 속력을 알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한계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본질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다. 원자의 위치와 속력을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더욱 대담하게 이론을 전개할 수 있었다. 원자는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다. 또한 원자를 관찰하고 있지 않을 때는 원자는 파동처럼 행동하지만 그 위치를 찾으려고 하면 입자의 성질을 보인다. 이 이상하고 모순적인 행태가 바로 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었으며 오로지 수학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27년 양 진영은 최후의 전투장소로 브뤼셀의 솔베이 학회를 택했다. 여기에 당시 세계의 모든 유명 원자 물리학자들이 다 모였다. 학회 내내 양 진영의 장수들이 차례로 나와 보어의 양자 역학에 대해 격렬하게 싸웠다. 최후의 싸움은 양자의 수장인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마무리했다. 보어는 마지막 날까지 아인슈타인의 공격을 모두 받아내었다. 그리고 결국 보어의 승리로 그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 날이 바로 구세대를 신세대가 대신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자연은 확률과 우연으로 설명되고 원자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사용해야 했다. 그 이후의 원자 물리학은 바로 이 학회의 결과에 토대를 두고 있다.

 

다시 거시적인 세계로 돌아오자. 오히려 아기 돼지가 집을 무엇으로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부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물론 당연히 벽돌로 지은 집이 거시세계에서는 더 튼튼하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저 저변에서 보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이 평생 원자와 전자에 대해 깊이 생각할 일이 몇 번이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삶을 둘러싼 이 세계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찰리 채플린과 아인슈타인의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마무리를 한다. 이 글은 BBC 다큐 원자의 세계를 참고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환호하는 관중들을 보며 채플린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은 참 위대해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고 있죠.”

 

그 말을 들은 채플린이 답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더 위대해요. 아무도 당신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당신을 존경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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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이야기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잊혀질 권리와 표현의 자유)

 


줄거리 : (삼국유사 버전) 경문왕은 귀가 당나귀처럼 길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단 한 사람, 그의 모자를 만드는 사람만이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답답해하다가 죽기 전에 도림사(道林寺) 쪽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쳤다. 뒤이어 이 소리는 바람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런 소리가 들리자 경문왕은 대나무를 베어 버리고 산수유나무를 심도록 했는데 그 후로는 "임금님 귀는 길다." 라는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동화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재밌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나라에서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도 나오고 유고슬라비아에도 있다. 임금님이 크게 깨달아 백성의 이야기를 큰 귀로 더 잘 듣겠다고 다짐한 내용은 유고슬라비아 버전이다. 이 외에도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나 심청전 등의 이야기도 다른 나라에 비슷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발견했을 때 인류의 공통 정서라는 부분에 대해 공감하고 조금 더 사고방식을 넓게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세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당나귀 귀를 가진 이가 모두 ‘왕’이라는 것이다. 즉 권력자에 대한 민중의 저항 내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표현의 자유, 나아가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 사실 ‘잊혀질’ 이라는 것은 피동 표현이 중복되므로 ‘잊힐’ 권리가 맞다)라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다만 이야기에서 한 쪽 상대방을 ‘왕’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중립적인 논지가 어려우므로 이하에서는 양자를 동등한 입장에서 다루도록 한다.

 


잊혀질 권리란 아직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기록이 저장되어 있는 영구적인 저장소로부터 특정한 기록을 삭제할 수 있는 권리' 또는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적법한 목적을 위해 필요치 않을 때, 그것을 지우고 더 이상 처리되지 않도록 할 개인의 권리'를 의미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4조의2(정보의 삭제요청 등) ①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일반에게 공개를 목적으로 제공된 정보로 사생활 침해나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침해를 받은 자는 해당 정보를 취급한 정보통신서비스 제공자에게 침해사실을 소명하여 그 정보의 삭제 또는 반박내용의 게재를 요청할 수 있다.’ 의 규정으로 법제화 되어 있다. 2010년에 스페인의 변호사인 마리오 코스테하가 구글(Google)과 신문사에 소송을 제기한 바가 있다. 그는 구글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예전 빚 문제와 재산 매각 내용이 나온 것을 두고 해당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구글은 내용이 모두 사실이기에 삭제할 이유가 없다고 거부했고 코스테하는 스페인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그 결과 2014년 5월 13일에 유럽 사법재판소는 구글에게 웹페이지의 링크를 삭제하라고 판결하였다. 법원이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최근 주식부자로 알려진 이희진씨가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는 각종 SNS와 TV 출연을 통해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더 많은 투자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기 행각이 드러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바로 인터넷상에서의 ‘명예훼손’문제였다. 사기를 당한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씨는 자신의 법무팀을 통해 각 포털 사이트에 자신에 대한 내용을 삭제 요청했다. 표현의 자유가 발달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명예훼손 규정이 상대적으로 강하기 때문에 그동안 일반 대중은 이씨에 대한 진실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이씨는 마음껏 사기행각을 벌일 수 있었다. 이런 것도 있다. 최근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상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과거에 잘못을 한 사람들을 잊지 말고 인터넷에서 상기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이 상기를 통해 주기적으로 과거의 일을 업로드하여 가해자 및 일반대중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한다. 또한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과거에 자신과 관련되었던 기사를 삭제 요청하여 저질렀던 잘못을 숨겨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사례들로 판단해보면 잊혀질 권리가 공익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과연 모두 정당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물론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뽀빠이 이상용을 기억한다. 우정의 무대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심장병 어린이 돕기를 통해 많은 아이들을 살렸다. 그러나 그는 억울하게 횡령 사건으로 기소를 당했으며 결국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했다. 당시 모든 매체가 이를 대대적으로 다루었다. 물론 이는 무혐의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가 무혐의를 받았다는 뉴스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지금 인터넷에 이상용을 검색하면 그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무혐의를 받은 사연에 대해 나오지만 공식적으로 그가 무혐의를 받았다는 기사는 거의 없다. 물론 각 포털 사이트에 횡령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삭제 요청을 하여 해당 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어떤 여성은 성인 사이트에서 자신의 부적절한 영상이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삭제 요청했다. 그러나 이런 영상들은 워낙 복잡하게 퍼져있고 또한 많은 성인 사이트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바람에 결국 완전삭제란 불가능하다. 해당 여성이 자살로 삶을 마감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이처럼 잊혀질 권리는 양날의 검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쉽게 판단해보면 잊혀질 권리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인정해주고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사실 그 판단을 누가 내리며 또한 그 판단의 공정성은 누가 담보하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것에 관해 유럽 사법재판소의 판결보다 조금 더 빠른 2013년의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노컷뉴스가 원고의 미국 정보원 역할 의혹을 집중 제기하자 원고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웹사이트와 포털의 삭제를 요청한 것이 요지이다. 대법원은 “기사(49건)를 삭제하고 D사, N사 등의 포털 사이트에 해당 기사의 삭제를 요청하라”고 판결한 1심과 원심을 인용하고 노컷뉴스의 상고를 기각했다. 이 판례를 통해 기사삭제의 당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대법원은 “그 표현 내용이 ①진실이 아니거나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닌 기사로 인해 ②현재 원고의 명예가 중대하고 현저하게 침해받고 있는 상태에 있는지 여부를 ③언론의 자유와 인격권이라는 두 가치를 비교·형량하면서 판단하면 되는 것”이라고 3단계 심사기준을 제시했다. 위 기준을 통해 공적인 자리에 있는 정치인에 대한 잊혀질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인이 아닌 일반 사인이 과거 사실을 이유로 현재 고통을 받고 있는 경우가 애매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사람은 과거 범죄를 저지르고 소년원에 갔었다. 그 후 그는 갱생되어 착실하게 기술도 배우고 학교도 마쳤다. 그리고 그 일이 미담이 되어 기사에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 그가 결혼을 앞두고 이 기사로 인해 예빈 신부와 갈등을 겪게 된다. 즉 신부 측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반대한다는 것이다. A는 자신의 기사를 삭제해줄 것을 요청중이다. 이 같은 사례로 보건데 잊혀질 권리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은 문제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21조 제1항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명시하되 동조 제4항을 통해 그것에 대한 한계를 규정했다. 누구나 인터넷이라는 대나무 숲에 가서 소리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든 남의 이야기든 말이다. 그러나 대나무 숲은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외친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는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책임져야 한다. 언론은 역할은 남이 모든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로 고통 받을 임금님 또한 배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오해를 한다. 표현의 자유는 결코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거짓을 말할 자유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확인도 안 한 채 ‘리트윗’과 ‘공유하기’로 자신의 생각이 아닌 감정을 대나무 숲에 퍼트리고 있다. 대나무가 선비의 상징이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있다. 잊혀질 권리는 정보화 사회에서 당연히 거쳐 가야할 논의다. 그리고 그 중요성의 크기는 성숙한 인터넷 문화에 반비례할 것이다. 무려 200년 전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을 보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재점검해보도록 하자.

 


 

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 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 다산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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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이야기 – 선녀와 나무꾼(거짓말과 오도된 진실)

 


줄거리 : 아주 옛날 한 마을에 나무꾼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달려와서는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나무꾼은 쌓아 놓은 나뭇더미 속에 사슴을 숨기고는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했다. 살아난 사슴은 나무꾼에게 산을 돌아 나가면 하늘의 선녀들이 멱을 감는 연못이 있으며 멱을 감는 틈을 타서 그중 선녀의 날개옷을 감추라고 했다. 다만 둘이 결혼해서 세 아이를 낳기까지는 날개옷을 감추고 절대로 보여 주지 말라고 했다. 나무꾼은 연못을 찾아가서 사슴이 일러준 대로 했다. 멱을 다 감은 선녀들이 다들 하늘로 돌아가는데, 날개옷을 도둑맞은 막내 선녀는 그러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 나무꾼은 막내 선녀를 제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내로 삼았다. (후략)

 

필자는 옛날부터 이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냥꾼에 대한 연민과 결혼하기 위한 나무꾼의 범죄 행위 등 그다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국제결혼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아껴(?) 놓았는데 최근 고위층 인사들의 거짓말이 화두에 오르기에 이렇게 꺼내 놓게 되었다. 이야기에서 나무꾼은 사슴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많은 동화책에서는 나무꾼은 착한 이미지로 그려 놓고 사냥꾼은 대부분 털보에 험악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이들은 그림을 보며 나무꾼의 거짓말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계속 강조했듯이 이렇게 상징을 통해 생각할 기회를 뺏는 것은 결코 아이들에게 좋지 않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사냥꾼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에 대한 정당성은 이야기하지 않도록 한다. 이번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와 기타 거짓말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들이다.

 

윤리적 행위의 기준은 다음 질문의 답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옳은 행동을 옳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결과주의 윤리설은 “행동은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갖는 한 옳다.” 라고 대답을 하고 동기주의 윤리설은 “행동은 의무의 최고 원리의 요구사항을 만족하는 행위의 규칙에 일치하면 옳다.” 라고 대답한다(전자를 목적론적 윤리설, 후자를 의무론적 윤리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즉 다시 말해 전자는 결과가 선하고 좋으면 옳고 후자는 동기가 선하고 좋으면 옳다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벤담이나 밀이 있고 후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칸트가 있다. 이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나무꾼의 행위는 벤담에게는 옳은 행위고 칸트에게는 그른 행위가 된다. 물론 이를 다 포섭하려고 하는 절충주의 윤리학이 있기는 하지만 위 두 이론만큼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논의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서인데 바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 :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이다.

 


샌델은 저서에서 공직자와 정치인의 도덕성은 일반인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루스벨트와 존슨의 거짓말을 예로 든다. 둘 다 전쟁 준비를 부정하여 대중을 속였는데 루스벨트가 히틀러에 대한 기만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면 존슨은 당선을 위한 거짓말을 했다.

즉 둘의 거짓말에는 목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의 도덕적 지위가 다르다고 말한다. 존슨의 거짓말은 도덕적으로 가치 없는 목적을 위해 행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와는 달리 클린턴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거짓말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이었고 비록 그것이 부적절할지라도 사적영역임을 이유로 부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탈무드」를 인용하는데 탈무드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세 가지 예외를 인정한다.

지식, 환대 그리고 성에 대한 거짓말이다.

무엇을 아느냐는 질문에 지적인 과시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 그리고 손님으로서 접대를 받았을 때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짓말, 마지막으로 부부의 성생활과 같은 사안에 대한 거짓말이며 클린턴의 경우에 여기에 해당한다고 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한국 사회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데 한국의 경우 공직자 및 정치인들에게 사적인 영역에서도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밌는 논의가 발생한다. 바로 ‘오도된 진실’에 대한 논의다. 오도된 진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고 타인을 기만할 수 있음을 말한다.

클린턴이 대선 후보 당시 그는 영국 유학 시절에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었는데 향락성 약물을 사용 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미연방이나 주의 마약류 금지법을 위반한 적이 없다” 라고 대답했다.


즉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런 오도된 진실과 거짓말에 대해 윤리학자들은 대부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남을 기만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같은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다르다. 칸트에 따르면 양자는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다. 칸트는 살인자가 집으로 찾아와 숨긴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물어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칸트는 거짓말이 그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히며 동시에 당사자의 인간적 존엄성도 손상시키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도된 진실은 다르다. 그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도덕적 고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노여움을 산 적이 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칸트에게 기독교 신앙을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떤 강연이나 저술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 했다. 그러자 칸트는 약속했다.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 저는 앞으로 종교와 관련된 모든 공개 강연과 저술 활동을 완전히 중지할 것입니다.”


몇 년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죽자 칸트는 바로 기독교에 대한 강연과 저술을 시작했다. 그는 약속도 깨지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약속은 오직 ‘국왕 전하의 충직한 신하로서’라는 조건 하에서만 유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오도된 진실에 대한 길을 어느 정도 열어둠으로써 거짓말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를 이야기에 적용해보면 사냥꾼이 나무꾼에게 사슴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나무꾼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그 사슴 본 적은 있는데 지금 이 앞에 있지는 않아요.”

사슴은 나무꾼 ‘뒤’의 나무 더미 안에 숨어 있으니 이것이 거짓말이 아닌 오도된 진실로서 가능하다. 물론 우리가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오도된 진실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직자들이나 정치인들이 오도된 진실을 어떤 방식으로 악용했는지 충분히 봤고 그것이 결코 그들의 도덕적 지위를 상승시킨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오도된 진실의 사례를 많이 보고 살아간다. 영국의 정치가였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거짓말의 세 가지 종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 세 가지는 Lie(거짓말), Damn Lie(나쁜 거짓말) 그리고 Statistics(통계)다(유명한 미국 드라마인 West Wing 시리즈 중 하나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했다). 다음 문장을 보자.

‘올해 매출액이 전년도에 비해 자그마치 120%로 상승했다.’

‘올해 매출액이 전년도에 비해 20%가 상승했다.’

실제 두 문장의 차이는 없다. 그런데도 전자가 후자에 비해 매출액이 엄청나게 상승한 것처럼 보인다. 범죄율도 마찬가지다. 관할 지역 내 살인사건이 전년도에 10명, 올해 7명이었다면 관할서에는 살인사건이 3건 감소했다고 표현하는 대신에 30%가 감소했다고 할 것이다. 진실과 거짓말을 적당히 섞는 경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에 따르면 거짓말에는 약간의 진실을 섞어야 제대로 효과를 낸다고 한다. 또 이런 경우는 명백히 거짓말임을 판단하기 어렵다. 민사소송에서 형사소송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사기죄가 성립해야 하며 이때 피의자의 고의성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이런 이유로 대부분 피해자들이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내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많이 거론된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1)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양 눈썹의 중간 부분이 위로 치솟아 이마에 잔주름이 만들어 진다.

2)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평소보다 코를 자주 만지는 경향이 있으며 자주 입을 손으로 가린다.

3) 오른손잡이가 무언가를 지어낼 때는 눈동자가 아래를 향한 후 오른쪽으로 보게 되며 왼손잡이는 그 반대다.

4)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늘어놓는다.

5) 질문을 했을 때 당신이 썼던 단어들을 그대로 반복한다.

6) 거짓말을 할 때 숨을 빠르게 쉬는 경향이 있으며, 짧은 숨을 여러 번 쉬다가 긴 숨을 내 뱉는다.

7) 거짓말쟁이는 침묵을 견디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 한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더 산만하게 설명을 하려 든다.

몰론 이 중 하나로 거짓말을 판별해서도 안 되고 이를 맹신해서도 안 된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은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일종의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뜻한다.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해 직면했을 때 많이 발생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도 진실로 믿기 때문에 그 사람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판단할 수 없다.

 


거짓말은 분명 인간 사회에 있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거짓말로 남을 해칠 수 있고 남을 구할 수 있다. 필자는 아직도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다. 사람들이 어머니를 보고는 나의 친척 누나로 오해한다는 거짓말.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이제 나는 다 컸으니 혼자서 다 잘 해낼 수 있다는 거짓말. 칸트처럼 살 수 없으니 거짓말을 아예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거짓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수록 결국 우리는 외로워질 것이다. 남이 나를 못 믿는 것처럼 나도 남을 못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페르마의 밀실(Fermat's Room, 2007)에 나왔던 거짓말에 관련된 문제를 제시하니 시간이 되는 사람은 천천히 풀어보길 바란다.


 "거짓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하고, 진실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진실을 말한다. 한 외국인이 문이 2개 있는 방에 갇혔다. 하나는 자유로 가는 문이고, 하나는 아니다. 한 문은 거짓 나라의 간수가, 다른 문은 진실 나라의 간수가 지키고 있다.

외국인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각 간수에게 한 번씩 질문을 하고, 답을 들을 수 있다. 어느 쪽이 진실 나라 간수이고 거짓 나라 간수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외국인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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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이야기 – 아낌없이 주는 나무(언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줄거리 : 한 소년과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소년은 나무 그늘 밑에서 잠도 자고, 그네를 매달아 타기도 하면서 나무와 친하게 지낸다. 소년이 청년이 되었을 때 소년은 그 나무에서 나온 열매를 따서 내다 판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소년에게 열매를 내준다. 시간이 흘러 소년이 중년이 되었을 때 소년은 아예 나무를 잘라 배를 만든다. 나무는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몸통을 내준다. 시간이 더욱 흘러 소년은 노인이 되어 밑동밖에 남아 있지 않은 나무에게 찾아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 나무는 그 소년에게 자신의 밑동 부분까지 내어주며 노인이 된 소년의 의자가 되어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우리에게 진정한 희생과 사랑에 대한 교훈을 준다. 소년의 이기심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짧지만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목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동화는 이기적인 인간 중심적 사고와 착취 구조를 묘하게 나무의 이타심으로 감추어 놓는 것에 성공했다. 만일 제목이 ‘무엇이든지 다 가져가는 소년’이었으면 독자들이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것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즉 제목을 통해 관점을 전환시킴으로써 본질을 흐려놓아 제대로 상황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내용이라도 제목이 ‘은혜 갚은 까치’가 아니라 ‘복 받은 나그네’라고 한다면 독자에게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실 내용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산림 자원이 어떤 식으로 활용되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무는 아낌없이 주지 않았다. 그저 인간만이 아낌없이 가져갔을 뿐이다.


 이렇듯이 제목은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기사 제목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에서 이것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살펴보자. 최근 사드를 성주 내 제3의 지역에 배치하는 것을 검토하겠다는 기사가 보도된 바 있다. 같은 내용을 보수 측 언론과 진보 측 언론이 어떻게 다루는지를 한번 보자. 먼저 보수 측에서는 기사 제목을 <사드 배치, 성주군內 새 지역 추천하면 적합성 조사> 라고 내보냈다. 그리고 진보 측에서는 <박대통령 사드, 성주군 ‘내’ 다른 곳 이전 검토 가능> 라고 내보냈다. 명확히 다른 제목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 번 해석해보자.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성주군 ‘내’라는 표현이다. 보수 측에서는 그것을 한자로 표기해 놓았고 진보 측에서는 ‘내’라고 표기하면서 강조를 했다. 진보 측에서는 사드 배치가 결국은 성주군 안에 있다는 것이 변함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에는 뒤 문장을 보자. 보수 측의 문장을 두 개로 구분해야 하는데 ‘새 지역 추천하면’과 ‘적합성 조사’라는 문장이다. 이 경우 만일 다른 적합지가 ‘있다면’ 적합성 조사를 실시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진보 측에서는 ‘이전 검토 가능’이라고 표현하면서 실제 다른 곳으로 결정될 여지가 크지 않음을 시사했다. 정리하자면 보수 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만일 지금 결정된 부지보다 더 적합한 곳이 있다면 배치 변경을 고려해보겠다’라는 것이고 진보 측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같은 성주군 내에서 변경되는 것이기에 큰 의미가 없다’라는 것이다. 이래서 언론보도는 양 측의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

 


이와 비슷한 예를 하나 더 보자. 최근에 30대 남성이 초등학생인 의붓딸을 수차례 성폭행 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사건이 있었다. 같은 기사인데 하나는 제목이 ‘초등생 의붓딸 성폭행 30대 남성 긴급체포’였고 어느 하나는 ‘초등생 의붓딸 성폭행 30대 탈북자 긴급체포’였다. 더 재미있는 것은 양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다. 전자의 경우 주로 한국의 치안 문제, 아동 학대 및 재혼 시 아이들의 양육문제에 관한 댓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대북관계, 탈북자 범죄 문제에 관한 댓글이 주를 이루었다. 정책학에서는 의제 형성 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 중 외부주도형(outside initiative model)이란 모형이 있는데 이는 의제 형성의 촉발 원인을 외부(시민단체 등)에서 찾는 것이다. 즉 외부주도 모형은 정부 조직 밖에 있는 비정부 집단 등에 의하여 정책문제가 제기되고 이것이 국민들의 쟁점으로 확산되어 그 여론의 압력에 의해 정부가 공식의제로 채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특별한 사건에 의해 촉발되는데 그런 사건은 언론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정리하자면 비정부 집단이 위의 두 기사 중에 어느 것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인식하는 문제가 달라지고 따라서 정부의 해결 방안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국민이 언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옛날이야기로 돌아오자. 만일 우리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단지 나무의 이타적 희생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이 사회는 바뀌지 아무것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자원의 개발을 나무라는 ‘무생물’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교묘하게 포장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물론 정작 이 이야기는 이타적으로 행동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소년의 이기심을 나무의 이타심과 대조하여 자기희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사실 이야기의 원래 제목은 The giving tree, 즉 그냥 ‘주는 나무’였다). 단지 제목이 사람의 인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려는 의도로 조금은 비꼬아 해석했다. 아무튼 우리가 조금 더 포장의 눈속임에서 벗어나 사실 관계 자체에 대해 주목할 때야 비로소 사회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고 싶다. 아낌없이 주지 말자. 그 대신 왜 줘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자. 그 의문들을 통해 거꾸로 소년에게 교훈을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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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이야기 - 황금알을 낳는 오리(배를 가른 오리 다시 살리기)


줄거리 : 어느 가난한 농부가 거위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거위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거위는 하루에 하나씩 황금알을 낳았다. 농부는 황금알이 늘어날 때마다 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농부는 하루에 하나씩만 알을 낳는 거위가 못마땅했다. 농부는 거위 뱃속에 더 많은 황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국 거위의 배를 가르기로 했다. 농부는 거위의 배를 갈랐지만 결국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 포켓몬 고가 큰 이슈다. 이 게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지명수배자가 스스로 경찰서에 들어가는가 하면 속초 시장이 홍보를 위해 스스로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의상을 입고 나오기도 했다. 먼저 '포켓몬 go(Pokémon Go)'란 나이앤틱(Niantic)이 개발한 증강현실 모바일 게임이다. 2016년 7월 6일 미국 등에서 출시되어 7월 16일 기준으로 총 35개 국가에서 정식 출시되었다. 이용자의 현실 공간 위치에 따라 모바일 기기 상에 출현하는 가상의 포켓몬을 포획하고 훈련시키며 다른 사용자와 대전을 하고 거래도 할 수 있다. 한편 포켓몬이란 ‘주머니 속의 괴물’이란 뜻인 ‘포켓 몬스터(Pocket Monster)’의 줄임말로 1995년 일본 닌텐도에서 개발한 롤플레잉 게임과 그 게임을 바탕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을 통칭하는 말이다. 포켓몬은 이후 문구류, 의류, 영화, 캐릭터 상품 등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로 한국에서는 서비스가 되지 않던 차에 마침 속초에서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속초로 몰려드는 사태가 빚어지고만 것이다.


 뒤늦게 이와 관련한 뉴스와 분석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는 포켓몬 고에서 사용된 기술이 이미 한국에서 몇 년 전에 개발되어 얼마간 상용화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즉 증강 현실 기술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충분이 활용 가능한 기술이었다는 말이 된다(증강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은 자신(객체)과 배경·환경 모두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반해,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은 현실의 이미지나 배경에 3차원 가상 이미지를 겹쳐서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결국 그렇다면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콘텐츠다. 이번 경우는 기술의 중요성 보다는 콘텐츠와 그 사업화에 성공 요인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 국산 캐릭터인 ‘뽀로로’를 활용하여 증강 현실 기반 게임을 만든다고 한다. 포켓몬 고의 성공요인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발상이다. 포켓몬이 갖고 있던 애초의 콘텐츠 컨셉이 포획과 대결이었기에 가능했던 성공이지 단순히 콘텐츠의 결합 문제로 오해를 하고 있다면 평생 포켓몬 고의 뒤만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도 포켓몬 go 같은 것, 예를 들어 뽀로로 go 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뽀로로라는 컨텐츠가 갖고 있는 컨셉에 어울리는 새로운 증강현실 게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일은 이제 한국에서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언가 아이템이 발굴되면 박수를 치며 황금알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배를 가른다. 그리고 옆집 오리를 보고는 죽은 오리 배를 애써 꿰매려고 노력한다. 애초에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처방이 옳을 수가 없다. 필자가 조심스럽게 향후 1년 이내에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면 다음과 같다.

① 포켓몬 고의 열풍으로 말미암아 한국형 포켓몬 고의 개발을 위해 정부에서 관련 예산을 확대하고 배분한다.

② 많은 기업들이 해당 보조금 및 지원을 받기 위해 우후죽순으로 관련 사업에 지원을 한다.

③ 지원을 받은 많은 기업들이 한국형 포켓몬 고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각종 규제에 부딪힌다.

④ 점점 관련 개발은 진척이 안 되고 시간만 흐른다.

⑤ 막상 게임이 출시되었으나 이미 더 높은 수준의 게임이 출시되어 경쟁력을 상실한다.

⑥ 이로 인한 예산이 얼마나 낭비되었는지에 대해 기사가 나온다.

⑦ ⑤에서 나왔던 새로운 게임의 유행 때문에 ①부터 다시 반복함.

 

왜 이런 예측이 가능하냐면 콘텐츠 산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예산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규제의 완화고 나아가 정책의 일관성이기 때문이다(물론 포켓몬 고의 경우는 지리정보시스템과 관련하여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일례가 바로 ‘셧다운제’다. 셧다운제란 16세 미만(도입 당시 18세)의 청소년에게 심야시간의 인터넷 게임 제공을 제한하는 제도로 밤 10시가 되면 16세 미만은 자동으로 게임을 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다. 현재 제도 도입 5년 만에 폐지가 거론되는, 정확히는 보호자 선택제로 바뀌는 이 제도와 관련해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2012년에 프로게이머 이승현 선수는 프랑스에서 개최된 스타크래프트2 게임 대회에 16세의 나이로 한국대표선발전 준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외국 시청자가 많고 해외에서 펼쳐지는 경기였기에 심야시간에 개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이기면 한국대표로 선발되며 또한 500달러의 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워낙 한국이 게임 강국이었기 때문에 해외 시청자가 약 일 만 명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실수(?)로 이승현 선수는 자신의 아이디를 사용했다. 경기 막판에 밤 10시가 가까이 되었고 이승현 선수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패배하게 되어 선발전에서 탈락하게 되었다(이승현 선수는 그로부터 2년 뒤 당당하게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중계를 보던 외국인들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어이가 없어 했다. 단순히 그 당시 경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스스로 한국이 게임 강국이라고 말하며 E-SPORTS 육성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즉 앞뒤가 맞지 않는 정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던 셈이다.

 


게임 산업은 한국에 있어 황금알을 낳는 오리였다. 그러나 현재 국산 온라인게임은 점차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 고유 콘텐츠의 부재, 각종 규제 그리고 기업의 단기적 시각에 의한 무리한 수익 구조 형성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특히 기업의 무리한 수익 구조 형성은 확률형 게임 아이템의 무분별한 양산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규제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오리의 배를 가른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에 와서야 다시 배를 꿰매서 살려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와서 느낀 것이 있었다. 가장 부러운 것은 그 콘텐츠의 풍부함과 이를 이용한 사업화였다. 필자가 느끼기에 일본은 상상력에 대해서는 규제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국가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수익을 위해 콘텐츠에 대한 모든 규제를 풀고 또 사업화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순적인 정책을 통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 때문에 예산을 낭비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죽은 오리는 살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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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한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가을이 되자 추수를 하고 각자 논에 볏가리를 쌓아 놓았다. 형은 동생이 결혼해서 쌀이 더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밤중에 몰래 논으로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동생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그날 밤 동생은 생각하기에 형은 식구도 많으니 쌀이 더 필요할 거라 여겨 밤중에 나가 자기 볏가리를 덜어 형의 볏가리에 쌓아 놓았다. 이튿날 논에 나가 본 형제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지난밤에 볏가리를 옮겨 놓았는데 전혀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튿날 밤에도 형제는 같은 행동을 했고, 셋째 날에 밤에 서로 마주친 형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줄거리와 같이 형제들이 지금 저런 행동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행법 상 형제간 재산 증여 시 공제액은 일천만원까지다. 밤새 겨우 볏가리를 서로 날라봤자 일천만원이 되지 않으므로 이 경우 증여세는 부과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형제의 행위는 소위 ‘상호출자’에 해당한다. 상호출자란 A사가 B사에 출자(出資 : 자금을 내다)하고, B사가 A사에 출자하여 자본을 교환하는 방식으로서 그 결과 두 기업이 서로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주로 기업집단의 계열사 간에 행해진다. 만일 A사와 B사가 각각 10억의 자본금을 지니고 있는데 A가 B사에 5억, B는 A사에 5억을 출자하게 된다면 실제로 돈은 오고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장부상으로는 A사와 B사의 각각의 자본금이 15억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경영권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지만 부실기업을 양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산규모 5조원 이상의 기업집단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으로 지정하고 있다(최근 기준을 10조원으로 올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순환출자’방식이다. 순환출자란 한 그룹 안에서 A기업이 B기업에, B기업이 C기업에, C기업은 A기업에 다시 출자하는 방식으로 그룹 계열사들끼리 돌려가며 자본을 늘리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는 상호출자 방식의 편법으로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많은 대기업들이 이를 행해왔다. 하지만 순환출자의 많은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신규 순환출자 금지제도가 2014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번에 더불어 민주당이 경제민주화 입법의 하나로 대기업들의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법안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즉 유예기간을 주고 기존의 순환출자구조까지도 해소하라는 것이다(이에 대한 다른 방법으로 지주회사라는 개념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설명하지 않겠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이 논의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최근 롯데의 ‘형제의 난’ 사태로 알아보도록 하자.

 


재작년에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아버지인 신격호로부터 롯데의 모든 직위를 해임당했다. 신동주 부회장은 누나인 신영자 이사장과 함께 아버지를 설득해 경영권 탈환을 시도했고 결국 신격호 회장은 신영자 이사장 및 신동주 부회장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 차남인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을 포함한 이사 6명을 해임했다. 그러나 신동빈 회장은 해임 다음 날 해임결정이 불법이라며 아버지 신격호 회장을 강제 해임시키고 해임 결정도 무력화했다. 이후 계속된 신동빈 회장의 승리로 경영권이 굳혀지나 싶었지만 대대적인 검찰 수사의 시작으로 인해 신동주 부회장이 재기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비슷한 예는 또 있었다. 두산 그룹의 ‘형제의 난’이다. 2005년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차남인 박용오 회장의 그룹 회장직을 셋째 박용성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자 박용오 회장이 '두산 그룹 경영상 편법 활용'이라는 진정서를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두산그룹의 비자금 및 기업 자금 횡령에 대해 밝혀내고 두산 관련자 3명을 불구속 기소하였다. 경영권 다툼으로 형제들을 고발한 이 사건으로 박용오 회장은 가문에서 제명되었고 이를 비관하여 2009년 자택에서 자살하였다. 대기업의 형제 경영권 갈등은 이뿐만이 아니라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금호아시아나, 대성 등에서도 나타났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대기업의 형제간 갈등이 많은 걸까.

 


바로 주식회사가 개인의 소유라는 생각을 전제로 계열사 간의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지분으로도 기업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왜곡된 경영구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족벌 경영이다. 실제로 롯데의 경우 신격호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 롯데그룹의 지분이 0.05%에 불과하며 여기에 신동빈 회장 등 롯데 일가 주식을 전부 끌어 모아도 전체 지분은 겨우 2.41%다. 3%가 안 되는 지분을 갖고도 자신의 소유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순환출자(롯데의 순환출자는 67개로서 전체 대기업 순환출자의 약 70%를 차지함)를 통한 계열사 지배였던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순환출자 해소 법안이 배경이 여기에 맞물려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순환출자는 기업의 자금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외국 기업의 적대적 M&A를 방어할 수 있게 만든다. 또한 계열사 간 협조를 긴밀하게 만들어 경영의 효율성을 꾀할 수도 있기에 기업의 자연스러운 진화이며 따라서 외국에서는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다. 그러나 순환출자 구조는 폭탄돌리기와 비슷해서 연쇄부도의 위험을 항상 갖고 있으며 계열사 간 협조는 다른 말로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이기에 대기업의 배타적 독점구조를 심화시킨다. 무엇보다도 주식회사에 대한 일개 개인의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다.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실제 경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의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앞서 보았듯이 형제를 갈라놓기에 이른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은 대기업에게 많은 부분을 대해 고민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금융의 국제화라는 관점에서 국내의 대기업들의 사회적 도리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정부는 기업에게 일정한 책임과 의무를 물을 수 있으며 그 정부는 바로 우리 국민이 세웠다. 따라서 어쩌면 이 문제는 대기업이 고민해야할 문제인 동시에 우리 국민 각자가 고민해야할 문제인 것이다. 이번 법안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 한번쯤은 관심을 가져볼만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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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 미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주변 오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상처를 받은 새끼 오리는 혼자 집을 떠나고, 어느 마음씨 좋은 할머니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 있던 고양이와 닭의 괴롭힘에 못 이겨 결국 또 혼자 떠난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우연히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못생긴 오리인줄만 알았던 새끼 오리는 다름 아닌 아름다운 백조였다. 이후, 미운 오리 새끼는 백조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며 행복하게 산다.

미운 오리 새끼의 교훈은 ‘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저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미운 오리 새끼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다른 오리들과 행복하게 잘 살았어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저 결론 덕분에 이야기 초반의 갈등은 사회 문제가 아닌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로 전환되어 또 다른 갈등의 악순환을 유지하고 있다. 외모에 대한 가치판단이 전혀 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미운 오리 새끼를 따돌렸던 오리들이 반성하고 후회할 만한 개연성도 전혀 보이지 않기에 차별하지 말자는 교훈을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겉모습을 보지 말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는 교훈도 있던데 백조가 아름답다는 수식을 한 순간 의미가 없는 교훈이다. 또한 실상 외면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라는 것처럼 무책임하고 어려운 것이 어디 있는가.

‘다름’에 대한 인정은 민주주의사회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그리고 그 ‘다름’에 대한 허용 기준은 도덕, 윤리, 법 그리고 대화 등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퀴어 문화 축제(동성애 축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은 종교 및 정서적인 문제고 ‘위법’이라는 것은 법적인 문제다. 동성애 자체가 위법은 아니다. 따라서 종교 및 정서적 문제로 판단해야 한다. 최근 한 결혼업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녀 약 50% 이상이 동성 결혼을 찬성했으니 대한민국 전체가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갖고 있다고도 보기 어렵다. 다만 최근 한국일보의 설문조사에서 ‘퀴어 문화 축제 어떻게 생각하세요?’란 질문에 반대가 96%가 나왔지만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동성애 문제는 적어도 ‘대화’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대화는 각자의 언어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공통의 언어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언어로 해야 한다. 상대방의 언어란 상대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식 체계 내에서 사고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통의 일반적인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의 “뭐가 미안한데?”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나아가 설득은 대화를 전제로 한다. 가장 최악의 설득 중 하나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을 끌어 들여 상대를 짓밟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상대가 듣건 말건 자기주장만을 펼치는 것이다. 이번 퀴어 문화 축제는 이런 최악의 대화 방식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기독교인 등은 무조건적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며 동성애자들을 비난 했으며, 동성애자들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이들의 시선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축제를 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집단은 한국사회에 갈등만을 야기한 채 본인들의 본래의 목적은 망각했던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한다. 대표적인 구절이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위기 20:13)’라는 구절이다. 대부분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 있다. 물론 신약에도 있긴 하다(고린도전서 등). 하지만 신약에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사랑하라)에 따라 많은 부분 모순이 생기면서 구약처럼 강하게 어필되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적어 놓은 복음서(마태, 요한 등)에는 거의 동성애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마태복음 8장의 내용을 놓고 그것이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어 보인다(이 부분이 사실 재밌는데 지면상 생략한다. 궁금한 사람은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여하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 이 논의가 과연 동성애자들, 나아가 비 기독교인에게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없다. 성경을 통해 대화하는 방식은 기독교인의 방식일 뿐이기에 전혀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필자가 성경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를 포함한 비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통한 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퀴어 문화 축제는 어떠했는가.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적인 한국의 정서마저 무시했다(여기서 한국의 정서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개념이다). 필자가 인식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왜 옷을 다 벗어야 하고 음담패설이 난무해야 하며 기본적인 공공질서를 무시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정말 동성애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비 동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서로 아름답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그런 방식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한국일보의 설문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그래도 스스로 많이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필자가 보기에도 조금은 불편했는데(실상 불편하다는 필자의 인식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싶었다. 만일 노이즈 마케팅이 목적이었다면 크게 착각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 개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사회의 기초는 ‘다름’이며 이는 상대방을 인정하는 대화를 통해서 ‘특수성’이 아닌 ‘다양성’이 된다. 상대방을 인정해줘야 하는 허용 경계는 결국 각자의 ‘개방성’에 있으며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를 성숙시키는 원동력이다.

모두들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라 그저 ‘다른 오리 새끼’다. 하지만 자신은 다른 오리 새끼라며 다른 오리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 역행하는 것이다. 애견센터 앞에서 보신탕을 먹지도 말며 보신탕집 앞에서 그들을 매도하지도 말자. 우리는 각자 다르며 또 그만큼 각자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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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 양치기 소년(믿지도 말고 속지도 말자)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거짓말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며 돌아갔지만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양치기 소년은 몇 번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서 양치기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으나 동네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양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모두 이 교훈을 ‘거짓말을 하지 말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얻을 수 있는 더 큰 교훈은 ‘큰 재난은 우리들의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수업시간에 갑자기 화재발생경고가 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들은 백이면 백,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름끼치고 무책임한 행동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양치기소년은 일종의 경보 장치다. 가장 첫 번째 사건 때 경보 장치가 고장(?)났다면 응당 교체했어야 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고, 아마 다음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리라.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으며 양떼의 죽음이라는 큰 재난을 감수해야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도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업무의 과중과 잦은 스크린 도어 결함 등이 지적되어 왔었다. 이 때 응당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노력’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우리는 정치인들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거짓말쟁이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치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표출함에도 그들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안전을 특정 소수에 의존할 때 어떻게 사회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행정학에서도 가외성(redundancy)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외성이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오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체제의 신뢰성과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중첩성(overlapping)과 중복성(duplication)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같은 업무의 전담부서를 2개 이상으로 구성하거나 예비 인력 등의 확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전이나 위생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이를 이야기에 적용하자면 양치기 소년 단 한사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양치기 소년을 한 명을 더 두었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랬다면 단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양들이 모두 잡아먹히는 최악의 상황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전의 영역에서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는 애초의 목적을 망각하게 되며, 투입 비용에 비해 사회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또한 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국 국민이 된다. 즉 효율(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력을 감소시킨 것이 고인이 된 김군이라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안전 불감증이라는 것은 재난의 작은 경고단계를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따라서 고장 나버린 시스템과 믿을 수 없는 정치인, 비효과적 행정체계를 불신하고 우리 각자가 안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의 미학’이다.

새로운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었고 그 자리에서 양치기 소년을 해고하는 동시에 2명의 양치기 소년을 정규직으로 고용하였고 1명을 예비인력으로 상시 준비시켰다. 또한 양치기 소년의 법적의무와 권리를 성문화하였으며 나아가 늑대가 나타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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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의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1

연재를 시작하며

연재에 앞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재미있는 연구를 시행한 바 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나중에 다시 알콜중독자인 남편을 만나 결혼한 비율이 얼마나 될까?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60%가 넘는다.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이해하기 힘든 결과가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딸은 어릴 적부터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며 그를 달랠 수 있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습득했다. 나중에 자연스러운 그녀의 이런 모습이 알콜중독자가 될 개연성이 큰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형성된 무의식은 이렇게 무섭다. 따라서 교육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에 한번쯤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나는 특히 어릴 적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했던 여러 가지 원천들 중에서 옛날이야기 즉 동화에 주목했던 것이다. 물론 다음부터 이야기할 옛날이야기들이 모두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절대 읽어주지 말아야할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릴 적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으며 지금의 우리를 다시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최근 인문학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문학은 지식이라기보다 지혜에 가까우며 지혜는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생각이란 비판적 사고를 전제로 하며 이는 사고의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다. 인류의 인구는 이제 70억이 넘으며 하다못해 대한민국의 인구도 5000만이 넘는다. 이 엄청난 다양성에 따른 욕망을 억제·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정답이 아니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역설적으로 인문학의 열풍은 그 시기의 적절성을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일주일에 하나씩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를 소개할 것이다. 그 옛날이야기를 통해 자칫 아이들이 어떤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지와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해볼 수 있는지를 제시할 것이며 그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 철학, 역사, 예술 등의 인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학, 행정학 등의 사회학, 나아가 물리학, 화학 등의 관점도 소개할 것이다. 독자들은 필자의 이런 관점을 하나의 예시로만 생각해주길 바라며 그렇기에 비난이 아닌 비판은 충분히 수용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토끼와 거북이(최선의 노력보다 최선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

 

줄거리 :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했다. 빠른 토끼는 시작하자마자 거북이를 저 만큼 앞질렀다. 거북이와의 차이가 많이 나자 토끼는 거북이가 쫓아오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여 낮잠을 자게 된다. 거북이는 끝까지 열심히 달려 결국 토끼를 앞질러 달리기 경주에서 이긴다는 내용.

일반적인 교훈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지만 다른 교훈은 ‘만일 당신이 평생 불리한 경주에서조차 끝까지 열심히 한다면, 상대방이 자만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이길 수 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 경주를 하면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왜 둘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애초에 불리한 조건에서 경주를 하는 거북이들에게 열심히 하면 이길 수‘도’ 있다는 거짓 선전을 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인 어긋남을 모른 채 우리 거북이들은 이미 왜곡된 시장에서 희망을 꿈꾸며 열심히 달리고만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단점은 모든 경쟁에 ‘시장’이라는 원리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대형마트에 밀려 문을 닫아야하는 할머니의 구멍가게에도 이 원리는 ‘합리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경우에 약육강식의 법칙을 ‘자연스러움’으로 소개하곤 한다. 그러나 사자는 토끼를 먹어야 산다. 강자가 약자를 먹어야 사는 구조와 강자와 약자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는 엄연히 다른 체계다.
 

점점 사회가 ‘무한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고 있으며 거북이들은 토끼가 낮잠을 자길 기대하며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는 시간제한이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시간제한이 있으며 젊은 청춘들이 아름다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거북이들은 저 멀리 가버린 토끼를 보며 절망에 빠져 포기하기에 이른다. 약육강식이나 경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며 ‘좋다, 나쁘다’라고 평가할 수 없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다만 나쁜 약육강식이나 나쁜 경쟁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토끼는 토끼끼리,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경쟁하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골목상권을 지켜줘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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