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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 – 양치기 소년(믿지도 말고 속지도 말자)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거짓말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며 돌아갔지만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양치기 소년은 몇 번 거짓말을 했다. 어느 날 진짜로 늑대가 나타나서 양치기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으나 동네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양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모두 이 교훈을 ‘거짓말을 하지 말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얻을 수 있는 더 큰 교훈은 ‘큰 재난은 우리들의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 수업시간에 갑자기 화재발생경고가 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들은 백이면 백,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냥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소름끼치고 무책임한 행동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양치기소년은 일종의 경보 장치다. 가장 첫 번째 사건 때 경보 장치가 고장(?)났다면 응당 교체했어야 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고, 아마 다음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리라. 결국 그것이 화근이었으며 양떼의 죽음이라는 큰 재난을 감수해야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도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이미 업무의 과중과 잦은 스크린 도어 결함 등이 지적되어 왔었다. 이 때 응당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노력’까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보자. 우리는 정치인들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 거짓말쟁이가 교체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정치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표출함에도 그들을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안전을 특정 소수에 의존할 때 어떻게 사회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바보 같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효율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행정학에서도 가외성(redundancy)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외성이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오류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체제의 신뢰성과 적응성을 높이기 위해 중첩성(overlapping)과 중복성(duplication)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같은 업무의 전담부서를 2개 이상으로 구성하거나 예비 인력 등의 확충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안전이나 위생의 영역에서 필요하다. 이를 이야기에 적용하자면 양치기 소년 단 한사람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양치기 소년을 한 명을 더 두었어야 한다는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랬다면 단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양들이 모두 잡아먹히는 최악의 상황은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전의 영역에서 지나친 효율성의 추구는 애초의 목적을 망각하게 되며, 투입 비용에 비해 사회적으로 부담해야 할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또한 이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국 국민이 된다. 즉 효율(이익)을 증가시키기 위해 인력을 감소시킨 것이 고인이 된 김군이라는 큰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안전 불감증이라는 것은 재난의 작은 경고단계를 사소하게 취급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 책임은 우리 각자에게 있다. 따라서 고장 나버린 시스템과 믿을 수 없는 정치인, 비효과적 행정체계를 불신하고 우리 각자가 안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신의 미학’이다.

새로운 줄거리 : 어느 한 마을에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양치기 소년은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늑대를 쫓으려고 달려왔다. 사람들이 화를 내었고 그 자리에서 양치기 소년을 해고하는 동시에 2명의 양치기 소년을 정규직으로 고용하였고 1명을 예비인력으로 상시 준비시켰다. 또한 양치기 소년의 법적의무와 권리를 성문화하였으며 나아가 늑대가 나타나는 상황에 대한 훈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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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의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1

연재를 시작하며

연재에 앞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시작하고자 한다.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재미있는 연구를 시행한 바 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딸이 나중에 다시 알콜중독자인 남편을 만나 결혼한 비율이 얼마나 될까?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60%가 넘는다.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이해하기 힘든 결과가 나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딸은 어릴 적부터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며 그를 달랠 수 있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습득했다. 나중에 자연스러운 그녀의 이런 모습이 알콜중독자가 될 개연성이 큰 남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형성된 무의식은 이렇게 무섭다. 따라서 교육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 부분에 한번쯤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나는 특히 어릴 적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했던 여러 가지 원천들 중에서 옛날이야기 즉 동화에 주목했던 것이다. 물론 다음부터 이야기할 옛날이야기들이 모두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절대 읽어주지 말아야할 이야기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릴 적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이야기들을 다시 곱씹으며 지금의 우리를 다시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최근 인문학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문학은 지식이라기보다 지혜에 가까우며 지혜는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생각이란 비판적 사고를 전제로 하며 이는 사고의 다양성에 기초하고 있다. 인류의 인구는 이제 70억이 넘으며 하다못해 대한민국의 인구도 5000만이 넘는다. 이 엄청난 다양성에 따른 욕망을 억제·통제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정답이 아니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역설적으로 인문학의 열풍은 그 시기의 적절성을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일주일에 하나씩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옛날이야기를 소개할 것이다. 그 옛날이야기를 통해 자칫 아이들이 어떤 잘못된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지와 그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해볼 수 있는지를 제시할 것이며 그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 철학, 역사, 예술 등의 인문학적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학, 행정학 등의 사회학, 나아가 물리학, 화학 등의 관점도 소개할 것이다. 독자들은 필자의 이런 관점을 하나의 예시로만 생각해주길 바라며 그렇기에 비난이 아닌 비판은 충분히 수용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 토끼와 거북이(최선의 노력보다 최선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

 

줄거리 :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경주를 했다. 빠른 토끼는 시작하자마자 거북이를 저 만큼 앞질렀다. 거북이와의 차이가 많이 나자 토끼는 거북이가 쫓아오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여 낮잠을 자게 된다. 거북이는 끝까지 열심히 달려 결국 토끼를 앞질러 달리기 경주에서 이긴다는 내용.

일반적인 교훈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지만 다른 교훈은 ‘만일 당신이 평생 불리한 경주에서조차 끝까지 열심히 한다면, 상대방이 자만하고 있을 때야 비로소 이길 수 있다’ 정도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토끼와 거북이는 달리기 경주를 하면 안 된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왜 둘이 달리기 경주를 하는지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 애초에 불리한 조건에서 경주를 하는 거북이들에게 열심히 하면 이길 수‘도’ 있다는 거짓 선전을 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인 어긋남을 모른 채 우리 거북이들은 이미 왜곡된 시장에서 희망을 꿈꾸며 열심히 달리고만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단점은 모든 경쟁에 ‘시장’이라는 원리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대형마트에 밀려 문을 닫아야하는 할머니의 구멍가게에도 이 원리는 ‘합리적’으로 적용된다. 이런 경우에 약육강식의 법칙을 ‘자연스러움’으로 소개하곤 한다. 그러나 사자는 토끼를 먹어야 산다. 강자가 약자를 먹어야 사는 구조와 강자와 약자가 공존할 수 있는 구조는 엄연히 다른 체계다.
 

점점 사회가 ‘무한경쟁’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되고 있으며 거북이들은 토끼가 낮잠을 자길 기대하며 세상으로 내몰리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는 시간제한이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시간제한이 있으며 젊은 청춘들이 아름다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거북이들은 저 멀리 가버린 토끼를 보며 절망에 빠져 포기하기에 이른다. 약육강식이나 경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며 ‘좋다, 나쁘다’라고 평가할 수 없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다만 나쁜 약육강식이나 나쁜 경쟁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토끼는 토끼끼리, 거북이는 거북이끼리 경쟁하는 구조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골목상권을 지켜줘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Posted by 독방의무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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